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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리뷰] 싯다르타(헤르만 헤세) : 체득과 사랑, 현재

by 밍어 2024. 2. 18.

 

 

 

헤르만 헤세의 싯다르타를 읽었다. 종교적 색상이 강한 책일 것 같아서 접근하기에 다른 책에 비해 조금 더 어려운 느낌이었다. 하지만 그것은 나의 편견이었고 종교를 떠나 모두가 읽어볼 만한 책인 것이 분명하다.

 

가르침으로는 알 수 없는 것 : 체득 

  싯다르타는 세존과의 대화에서 아주 당돌하고 야무지면서도 예의 바른 모습을 보여준다. 싯다르타는 세존의 깨달음을 한없이 존경하고 사랑하면서도 한 가지 의문을 가지고 있었다. 그것은 바로 가르침에 대한 것이며, 싯다르타는 진리는 가르침으로 전달할 수 없다고 믿는다. 세존은 제자들에게 존귀한 가르침을 주고자 하지만 그 안에 세존이 내면으로부터 스스로 깨달은 것을 온전히 담아내기에는 역부족이라는 것이다. 세존이 제자들을 대신해 침잠을 해주고 구도 행위를 해줄 수는 없다. 세존의 가르침은 일종의 가이드라인을 제시해 주는 것이며, 깨달음을 위해서는 우리 스스로 탐구하고 견디는 인내의 시간이 필요하다. 무언가를 언어로 규정해 버리는 순간 그 무언가는 언어의 틀 속에 갇혀 버린다. 세존이 아무리 가르침을 언어로 전하려고 해도 그것을 100% 완벽하게 언어로 구사할 수는 없으며, 말로 옮겨지는 과정에서 진리는 좁아지고 왜곡되고 만다.

  가르침이란 그런 것이다. 학생들은 교사에게 어떻게 하면 공부를 잘할 수 있냐고 묻는다. 교사는 다양한 길을 제시해줄 수는 있겠다만, 그것을 실천하는 과정 속에서 스스로 배움을 만들어 가는 것은 온전히 학생의 몫이다. 수학 문제를 푸는 공식은 가르쳐줄 수 있을지라도 직접 문제를 풀고 얻는 성취감과 '아하!' 하는 깨달음은 스스로 만들어 내야 한다. 싯다르타는 체득의 중요성을 역설적이게도 온갖 가르침을 좇는 과정에서 스스로 체득했다. 말해질 수 있는 진리는 일면적일 뿐이라는 것을 아는 것. 고빈다와 싯다르타의 차이는 바로 여기에 있다.

 

인간은 무엇으로 살아가는가 : 사랑

 

 

  사랑을 배움의 대상으로, 기술로써 대하던 싯다르타는 자신이 사랑을 할 수 없는 부류의 인간이라고 생각한다. 어린아이와 같이 대가를 바라지 않는 순수하고 맹목적인 사랑. 싯다르타에게는 그런 사랑을 하는 자들이 불가사의한 존재로 여겨졌다. 심지어 자신은 사랑보다 더 고귀한 어떤 것을 추구하는 존재라고 믿으며 본인을 그런 사람들보다 우월한 존재로 여기는 다소 거만한 모습들도 보여주었다. 일반적인 사람들이 느끼는 감정들을 싯다르타는 다소 하찮고 의미 없는 유희이자 순간의 감정으로 치부했다. 그러는 동시에 한편으로는 그들을 부러워했는데, 그들은 자신의 삶에 중요성을 부여할 줄 아는 사람들이었기 때문이다. 안타깝게도 싯다르타는 그런 모습을, 진실로 기뻐하고 슬퍼할 줄 알며 이를 원동력으로 살아가는 모습을 배우지는 못했다. 자신의 아들인 한 소년을 만나기 전까지는 말이다.

  싯다르타는 평화를 포기하고 아들과 함께하는 사랑의 고통을 선택했다. 아들에게 무한한 사랑을 베푸면서 그와 함께하기를 바랐다. 억세고 참을성 없는 소년이 자신처럼 과오를 반복하지 않도록 세상의 풍파로부터 지켜주고 싶어했다. 그러자 바주데바는 싯다르타에게 물었다. 어떤 스승이, 어떤 가르침이 누군가를 진정으로 지켜줄 수 있다고 생각하느냐고. 체득의 중요성을 이미 깨달았던 싯다르타는 끝내 자신을 떠나는 아들을 붙잡을 수 없었다. 아들을 향한 맹목적인 사랑의 과정에서 싯다르타는 사랑의 가치를 배웠다. 사랑이란 본질적인 것이며, 우리를 살아가게 하는 원동력이며, 어떠한 어리석음일지라도 기꺼이 받아들이게 하는 고통이자 축복이다. 싯다르타는 아들로 인해 진정으로 사랑을 할 수 있는 사람이 되었고, 자신의 삶에 중요성을 부여할 수 있게 되었으며, 오만함의 자리엔 따뜻함이 자리 잡았다. 

  싯다르타는 자신에게 가르침을 갈구하는 고빈다에게 단지 이렇게 말할 뿐이다.

  "사랑이라는 것 말일세, 고빈다, 그 사랑이라는 것이 나에게는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으로 여겨져. 이 세상을 속속들이 들여다보는 일, 이 세상을 설명하는 일, 이 세상을 경멸하는 일은 아마도 위대한 사상가가 할 일이겠지. 그러나 나에게는, 이 세상을 사랑할 수 있는 것, 이 세상을 업신여기지 않는 것, 이 세상과 나를 미워하지 않는 것, 이 세상과 나와 모든 존재를 사랑과 경탄하는 마음과 외경심을 가지고 바라볼 수 있는 것, 오직 이것만이 중요할 뿐이야."(p214)

 

 지금 이 순간 : 과거와 미래는 현재의 그림자

  수많은 현인들의 가르침을 좇던 싯다르타가 끝내 정착한 스승은 바로 강이었다. 강은 싯다르타에게 인간이 들려줄 수 없는 소리를 들려주었다. 강의 가르침과 비웃음과 온갖 소리를 들으며 싯다르타는 성장했다. 그리고 끝내 '단일성'을 깨닫는다. 싯다르타에게 시간의 구분은 중요하지 않다. 흐르는 강물을 현재의 강물과 미래의 강물, 과거의 강물로 나눌 수 있는가? 흘러서 나를 지나쳐 버린 강물은 미래의 강물이 되는 것인가? 그렇지 않다. 강물은 항상 현재의 강물이고 흐르는 중인 강물이다. 우리가 과거라고 생각하는 시간도 현재였고, 미래라고 생각하는 시간도 현재가 될 것이다. 그러니 시간의 구분은 무의미하며 우리에게는 현재, 지금 이 순간만이 있을 뿐이다. 지금의 나는 미래의 더 나은 내가 되기 위한 과정이 아니고 이미 나는 완전한 상태로 현재에 존재하고 있다. 무엇인가 큰 존재가 될 가능성을 지닌 내가 아니라 이미 완전한 나이다. 그렇기에 나는 나를 사랑할 수 있다. 돌멩이 하나를 사랑한다면 그 돌멩이가 언젠간 가치 있는 존재가 될 것이기에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돌멩이가 가지고 있는 줄무늬, 감촉, 우푹 패어 있는 구멍, 돌멩이의 색 그 자체가 이미 완전한 현재의 돌멩이이기에 사랑한다는 것이다.

  더 훌륭한 사람이 되기 위해 현재는 미래를 위한 수단이 될 수 있으며, 미래의 행복을 위해 현재의 행복을 자제할 줄 알아야 한다고 믿었다. 그렇지만 내가 바라는 나의 모습 역시 오래전부터 내 안에 있는 것이다. 내가 나라는 이유만으로 지닌 가치와 의의가 있음을 마음에 새기며 살아가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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