적당한 무관심이 사람을 살린다
나는 지금도 그때 거기가 그렇게 가고 싶었던 게 신의 부르심이었다고 생각한다. 언덕방에 들어가자 곧 살 것 같았던 것은 적당한 무관심 때문이었다. 나는 그때까지 24시간 딸의 정성스러운 보살핌을 받고 있었기 때문에 처음에는 다소 섭섭했지만 그 적당한 무관심이 숨구멍이 돼 주었다. 그렇다고 아주 무관심한 건 아니었다.
(중략) 그러나 그 모든 게 적절할 뿐 지나치는 법이 없었다.(p49~50)
1988년 박완서 작가에게 무슨 일이 있었나 찾아보니 사랑하는 아들을 사고로 먼저 떠나보낸 참척의 고통을 겪으셨더라. 내가 조금 더 성숙해진 후에 그때의 이야기를 쓴 <한 말씀만 하소서>를 시간 내어 꼭 읽어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고통 속에서, 자식을 잃은 엄마를 위로한 건 남은 자식들의 극진한 보살핌이 아닌 언덕방의 적당한 무관심이었다.
적당한 무관심이라니 얼마나 듣기 좋은 말인가. 상대를 위하면서도 상대에게 부담을 주지 않는 적절한 선을 지키는 미덕이 엿보인다. 자신의 몫인 고통을 꼭꼭 씹어 소화해낼 충분한 시간을 줄 것, 그 누구도 간섭하지 않는 작은 방 한 칸을 줄 것, 지나친 염려와 관심으로 불편하게 하지 말 것. 그러면 사람은 다시 살아질 터이다. 나에게도 이러한 적절한 무관심이 큰 힘이 되었다. 나에게 무슨 일이냐고 캐묻지 않으면서도 내가 연락하면 언제고 만나 따스히 맞아주는 친구들이 있음에 늘 감사하다. 억울함과 슬픔, 비참함은 그 자체로는 힘이 없어 누군가 관심을 주지 않으면 내 안에서 사그라 든다. 이제는 어느 정도 웃으며 이야기할 수 있는 그날이 되어 다행이다.
친구 같은 선생님
왜 부모면 부모다운 부모가 되려 들지 않고 굳이 친구 같은 부모가 되겠다는 것일까?
사람에겐 친구는 친구로서 부모는 부모로서 따로 존재 가치가 있을 터인데도 말이다. (p204)
친구 같은 선생님이 되어 주겠다고 말하던 때가 있다. 그런데 선생님이면 선생님이지 왜 친구 같은 선생님이 되겠다고 그리 다짐했나 생각해본다. 친구 같다는 건 무엇일까. 격의 없이 터놓고 지낼 수 있는 친밀한 사이, 그러니까 좋은 사이임에 분명하다. 그런데 나는 학생들에게 종종 “내가 네 친구냐?”라는 말로 꾸중을 한다. 친구 같은 선생님이 되겠다고 말하면서 진짜 내게 친구처럼 굴면 그냥 넘어가지 않는다. 그러니 친구 같은 선생님이 되겠다는 말은 허물없이 편하게 지내되 웃어른에게 갖춰야 할 예의범절을 잘 갖추라는 조금은 모순적인 말이다. 친구 같은 선생님은 학생들에게 인기가 좋다. 나는 그저 학생들과 친하게 지내며 인기를 누리고 싶었던 건 아니었을까.
선생님은 선생님이지 친구가 될 순 없다. 나는 이제 선생님 같은 선생님이 되고 싶다. 교육자로서 본보기를 보여주며 존경받는 사람이 되고 싶다. 아이들의 비위를 맞춰주는 이해심 많은 착한 선생님, 학생들에게 인기 좋은 선생님이라는 자기만족과 과시에서 벗어나 때에 따라서는 단호하게 혼낼 줄도 알고, 전문적인 모습으로 존경 받으며, 학생들이 믿고 의지할 수 있는 어른이 되리라 다짐한다. 아이들과의 시시콜콜한 수다도 좋지만 진지한 고민 상담을, 내면의 이야기를 들어줄 준비가 이제야 조금 된 것 같다.
만추국을 지닌 존재이기를
“아주머니, 이걸로 하십시오. 이건 만추국(晩秋菊)이라고 아주 늦게야 피는 겁니다.
아마 크리스마스 때나 활짝 필걸요. 무슨 빛깔이냐고요? 그건 저도 모르죠.
이렇게 꽃봉우릴 꽉 다물고 있는 걸 어떻게 압니까. 그렇지만 꼭 아주머니가 좋아하는 빛깔로 필 겁니다.”(p340)
이런 류의 말들은 듣기 좋은 위로와 격려이지만 가끔은 무책임한 말이 아닌가 생각한다. 그렇지만 이런 따스한 위로를 들으면 얼굴에 미소가 자연히 번지고 마음 저 아래부터 훈훈해지는 기분은 어쩔 수 없나보다. 누구에게나 만추국은 있다. 늦지만 반드시, 그것도 내 마음에 쏘옥 드는 색깔로 나타날 나의 열매, 결실! 지금은 꽃봉오리 상태여서 아무도 알아주지 않고, 나조차 나의 가능성을 믿지 못할 수도 있으나 국화 장수의 말마따나 우리 모두는 화려한 만추국을 지니고 있는 존재이기를
사랑을 무게로 안 느끼게
“내가 너한테 어떤 정성을 들였다고. 아마 들인 돈만도 네 몸무게의 몇 배는 될 거다. 그런데 학교를 떨어져 엄마의 평생 소원을 저버려?”
“ 내가 너를 어떻게 키운 자식인데 장가들자마자 네 계집만 알아. 이 불효막심한 놈아.”
이런 큰 소리를 안 쳐도 억울하지 않을 만큼, 꼭 그만큼만 아이들을 위하고 사랑하리라는 게 내가 지키고자 하는 절도다.
부모의 보살핌이나 사랑이 결코 무게로 그들에게 느껴지지 않기를, 집이, 부모의 슬하가, 세상에서 가장 편하고 마음 놓이는 곳이기를 바랄 뿐이다. 아이들은 예쁘다. 특히 내 애들은. 아이들에게 과도한 욕심을 안 내고 바라볼수록 예쁘다. (p380)
이 부분을 읽으면서 영화 엘리멘탈이 떠올랐다. 주인공 엠버는 부모님의 희생적인 사랑 아래에서 건강하고 밝은 사람으로 성장했다. 그런 엠버가 부모님의 사랑에 보답하는 방법은 자신의 꿈인 유리 공예를 저버리고 부모님의 가게를 물려받아 그들이, 특히 아버지가 원하는 일을 하며 사는 것이었다. 엠버는 부모님의 사랑의 무게를 무겁게 느꼈다. 엠버의 부모님과 엠버는 부모님의 지지로 행복한 결말을 맞이했지만 이야기가 그렇게 해피엔딩으로 끝나는 경우가 얼마나 될까. 부모님의 슬하가 편안한 곳이기를, 걱정된다는 말을 무기로 자식을 억압하지 않기를, 세상의 모든 자녀가 부모의 지지를 받으며 건강히 독립하기를 간절히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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