늙는 것의 기쁨
너무 늦기는 했지만, 나이를 먹으니까 자신을 옥죄던 자의식의 경계가 무너지면서 나는 흐리멍덩해지고 또 편안해진다. 이것은 늙기의 기쁨이다. 늙기는 동사의 세계라기보다는 형용사의 세계이다. (중략)
이 흐린 시야 속에서 지금까지 보이지 않던 것들이 선연히 드러난다. 자의식이 물러서야 세상이 보이는데, 이때 보이는 것은 처음 보는 새로운 것들이 아니라 늘 보던 것들의 새로움이다. 너무 늦었기 때문에 더욱 선명하다. 이것은 ‘본다’가 아니라 ‘보인다’의 세계이다. (p74)
'늙다'와 ‘젊다’를 사전에 검색하면 재밌는 사실을 하나 발견할 수 있다. 바로 ‘늙다’는 동사인데, ‘젊다’는 형용사라는 것이다. 전공 문법 공부를 하며 동사와 형용사를 구별하는 방법에 대해 수없이 공부했음에도 여전히 이해가 안 가는 부분이다. 아무래도 시간의 흐름이라는 새로운 기준을 동사와 형용사를 구별하는 기준으로 추가해야 하는 게 아닌가 싶다. 늙는 것이 형용사의 세계라고 하고, 정의를 해보자. 나는 ‘늙다’를 ‘젊은 날의 자의식과 초조함에서 벗어나 세상을 널리 보는 안목을 갖춘 편안한 상태’ 정도로 정의하고 싶다. 늙기의 기쁨이 역설이라 생각했다. 그 안에 담긴 진리에 대해선 생각해보지 않고 그저 늙는다는 것과 기쁨이라는 모순이 주는 느낌에 그렇게 생각했다. 그런데 내가 어리석었다. 내가 보는 세계만큼 보이는 세계도 아름다워지겠구나 새로이 생각한다. 능동성을 잃는다는 것이 꼭 나쁜 것은 아니었구나. 젊은 시절의 열정과 패기는 사라졌더라도 그 자리에 관록과 여유가 가득 차 있을 테다.
사소함의 슬픔
죽은 아이의 목소리, 웃음소리, 노랫소리, 빛의 폭포처럼 흘러내리던 딸아이의 검은 머리채, 처음으로 립스틱 바르고 깔깔 웃던 입술, 아들이 동네에서 축구하고 돌아온 저녁의 땀냄새, 학교 가는 아이를 먹이려고 아침밥상을 준비할 때 찌개가 끓으면서 달딸거리는 소리...... 이것들은 모두 하찮은 것인가.
이 사소한 것이 인간에게 얼마나 소중한 것인가를, 그것을 잃고 슬퍼하는 엄마들을 보면서 비로소 안다. (p88)
세월호를 이야기하는 김훈의 시선은 참으로 따뜻하면서도 냉철하고, 그래서 존경스럽다. 최근 수업시간에 세월호 관련 시를 읽는 시간을 가졌다. 사회문화적 맥락이 담화에 미치는 영향에 관한 수업이었는데, 연인 간 이별시로 읽히던 작품이 사회문화적 배경에 대한 이해를 바탕으로 다시 감상하니 세월호 추모시가 된 것이다. 함께 정호승 시인의 인터뷰 자료를 읽으며 참척의 슬픔을 비롯하여 우리 사회의 슬픔을 외면하지 않고, 사회의 고통과 슬픔을 함께 나누며 살아가자는 메시지로 수업을 마무리했다.
사소한 것은 소중한 것이다. 이런 사소함이 사람을 울린다. 최근에 나온 비비의 <밤양갱>이라는 노래가 생각난다. 연인과 헤어지면 고가의 선물, 호화 데이트가 아니라 같이 나누어 먹던 양갱 하나가 더욱 생각난다고 한다. 당연하다 여기던 사소한 일상이 사라지면 우리의 삶은 무너진다. 그러니 미리미리 잘하자.
슴슴한 글
김훈의 글은 간결하다. 조잡스럽지 않고 묵직하다. 그가 사랑한 평양냉면을 먹으며 이 국수의 국물은 김훈의 글과 같은 국물이라고 생각했다. 평양냉면의 국물은 슴슴하다. 슴슴한 것과 싱거운 것은 다르다. 비슷해 보이는 단어의 뜻을 명확히 구별하는 방법은 그 단어들의 반의어를 생각해 보는 것이다. 슴슴함의 반대는 가벼움이고, 싱거움의 반대는 짠 것이다. 슴슴함은 누르는 힘이 있다. 슴슴함은 식도를 지나 우리의 위까지 묵직하게 깔려간다. 가벼움은 누르는 힘 없이 그저 입안을 때리다 곧장 자취를 감춘다. 집에서 따라해볼까 이 국물의 비결에 대해 곰곰이 생각해보다가 그냥 또 을지로에 평양냉면을 먹으러 오기로 마음 먹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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